K반도체, 미중 기술 패권 경쟁에 발목…공급망 불안 심화

미국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 대한 미국산 장비 반입 규제를 강화하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의 위기감이 고조된다. 국내 반도체 기업의 미세공정 전환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추가 투자와 판매 확대에도 악영향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거센 추격에 불안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미중 패권 경쟁에 따른 피해를 국내 기업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될 상황이다.
미 상무부는 지난달 29일 삼성전자·SK하이닉스·인텔이 중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도록 예외적으로 허용했던 장비 반입 권한을 철회했다. SK하이닉스가 인수한 중국 다롄의 인텔 법인을 고려하면 한국 반도체 기업만을 겨냥한 조치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정부는 2022년 10월 미국 장비 회사가 중국 반도체 기업에 첨단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수출통제를 발표했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은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로 지정해 조건부로 규제를 풀어줬다. 이번 조치는 이러한 예외 규정을 철회한 것이다. 이로 인해 내년 1월부터 국내 반도체 제조사들은 중국 내 반도체 공장에 미국 장비를 공급할 때마다 승인을 받아야 한다. 사실상 미국 장비 반입을 전면적으로 막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전체 메모리 사업에서 중국 공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삼성전자 시안 공장은 유일한 낸드플래시 해외 거점으로 삼성전자가 생산하는 전체 낸드 중 35~40%가량을 이곳에서 생산한다. SK하이닉스는 우시 D램 공장에서 전체 D램 생산량 중 40%를 생산하고 인텔로부터 인수한 다롄 낸드공장에서도 최소 10%대 후반의 생산 비중을 차지한다. 두 회사가 중국 공장에 투자한 금액은 수십조 원에 달한다. 삼성전자는 2012년 중국 시안 1공장에 180억 달러(약 12조 원), 2017년 시안 2공장에 70억 달러(약 8조 원)를 투자했으며 2019년 80억 달러(약 9조 6000억 원)를 추가 투입해 규모를 확장했다. SK하이닉스는 우시 D램 공장에 5조 원에 달하는 금액을 투자했고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에는 10조 원을 썼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 공장에 대한 반도체 장비 반입 허용을 철회하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는 비상에 걸렸다. 이미 현지 공장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집행한 상황에서 시설 개선을 위한 추가 투자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공장 철수 또한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수십조 원의 비용을 들인 공장을 철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며 “불확실성이 확대되면 공장 가동과 운영에도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한다”고 토로했다.
차세대 장비를 반입하지 못할 경우 중국 공장의 첨단 메모리 공정 전환은 불가능하다. 메모리 사양이 올라갈수록 공정 수도 늘어나면서 더욱 많은 수의 첨단 장비가 필요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그동안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지위를 활용해 다양한 공정 전환 방안을 모색해왔다. 삼성전자는 2023년부터 시안 공장의 주력 제품을 6세대(128단)에서 8세대(236단) 낸드로 전환했고 지난해부터는 9세대(286단) 제품 생산을 추진해왔다. SK하이닉스도 극자외선(EUV) 등 일부 첨단 공정만 국내 사업장에서 처리하는 방식으로 10㎚(나노미터)급 4세대(1a) D램을 우시 공장에서 만드는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이러한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최악의 경우 전체 메모리 생산량 중 40%가량을 기술 진보가 없는 레거시 제품만 생산해야 할 수도 있다. 생산 면에서도 제약이 불가피하다. 정기적인 교체와 유지 보수가 필수인 반도체 장비 수급이 지연될 경우 수율 악화 등 생산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 노광부터 증착·식각 등 핵심 공정에 사용되는 반도체 장비 산업은 미국 업체들이 주도한다.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장비 산업의 상위 5개 업체 중 3개(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램리서치·KLA)는 미국 업체이고 나머지 2개 업체(ASML·도쿄일렉트론)도 미국 기술을 상당 부분 활용한다. 이는 국내 반도체 장비 업체들에게도 직격탄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오히려 중국 메모리 업체들은 반사이익을 거둘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공장에서 공정 전환에 어려움을 겪는 동안 중국 업체들이 자국 장비를 발판 삼아 점유율을 쉽게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칩워’ 저자인 크리스 밀러 터프츠대 교수는 “이번 조치가 중국 업체에 대한 추가 제재와 병행되지 않는다면 한국 기업들의 희생을 대가로 중국 업체들이 시장점유율을 확대하는 결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대중국 규제 여파는 이미 숫자로 드러나고 있다. 중국의 대표 D램 업체인 CXMT의 올해 생산량은 전년 대비 50% 이상 늘었다. 이를 통해 D램 시장 점유율은 올 1분기 6%에서 4분기 8%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삼성전자 중국 반도체 생산법인인 삼성 차이나반도체(SCS)의 상반기 매출은 4조 4146억 원으로 전년 대비 36.4%, 반도체 판매법인인 상하이삼성반도체(SSS)의 매출은 12조 3457억 원으로 전년 대비 22% 각각 하락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고한 반도체 100% 품목 관세와 관련한 세부 사항은 여전히 불확실한 가운데, 삼성전자를 대상으로 보조금을 매개로 한 지분 거래 가능성도 언급되는 등 미국의 압박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될 경우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경영 환경은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 상무부 대변인은 “글로벌 반도체 산업·공급망 안정에 중요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필요한 조치를 취해 기업의 정당한 권익을 단호히 수호할 것”이라고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는 VEU 철회와 관련해 “반도체 기업의 원활한 중국 사업장 운영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안정에 중요하다”며 “미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해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